첫째 물음, 혼자
혼자 있을 때 사람은 자기를 표준에 대어 봅니다. 그런데 맞지 않으면 표준을 의심하지 않고 자기를 의심합니다. 왼손잡이 아이가 가위질이 안 될 때 가위가 아니라 자기 손을 탓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이 붙지 않은 쪽이 표준입니다. 인생의 여덟 결에서 결은 흠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다만 결을 핑계로 쓰면 그때부터는 결이 아닙니다.
왼손잡이 아이는 가위를 탓하지 않습니다
가위가 손 닿는 데 있으면 하나 가져와 보십시오.
가윗날은 두 장입니다. 그 둘이 겹쳐 지나가면서 종이를 자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날이 서로 스친다는 것입니다. 사이가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종이는 잘리지 않고 그 틈으로 들어가 휩니다.
오른손으로 쥐고 천천히 오므리면서 두 날이 만나는 자리를 보십시오. 두 날이 서로 눌리며 지나갑니다. 같은 가위를 그대로 왼손으로 옮겨 쥐고 오므려 보십시오. 이번에는 두 날 사이가 벌어집니다.
가위를 바꾸지 않았는데 이렇게 됩니다.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이 서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손을 오므리면 힘이 곧게만 들어가지 않고 옆으로도 조금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냥 가위라고 부르는 것은 오른손에서 그 옆 힘이 두 날을 맞붙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왼손으로 쥐면 같은 힘이 그대로 뒤집혀 두 날을 벌립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 가위는 오른쪽 날이 위로 옵니다. 그러니 왼손으로 쥔 아이에게는 그 날이 자기가 따라가야 할 선을 가립니다.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자르고 있는 것입니다.
왼손잡이 아이가 이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 아이가 아는 것은 하나입니다. 옆자리 아이는 선을 따라 잘 오리는데 자기 종이는 자꾸 씹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웁니다. 나는 손재주가 없구나.
여기서 아무도 그 아이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가위가 잘못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열에 아홉이 오른손잡이니 그렇게 만든 것이고, 그것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어긋난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 아이가 가위를 의심하지 않고 자기 손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용한 장치가 하나 있습니다.
가게에서 그것은 그냥 가위라고 불립니다. 왼손잡이용만 왼손잡이 가위라고 불립니다. 이름이 붙지 않은 쪽이 표준입니다. 그리고 표준은 자기가 표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것이 물건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요즘 가위는 좌우 구분이 없지 않으냐고.
맞습니다. 문구점에 걸린 가위는 대개 손잡이가 대칭이고, 양손 겸용이라고 적혀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날은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오른쪽 날이 위입니다. 바뀐 것은 손잡이 모양뿐이고, 안 잘리던 까닭은 손잡이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더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오른손잡이용이라고 이름이라도 붙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겉이 대칭이고 누구나 쓰는 물건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쓰는 물건인데 나만 안 되면, 그 아이는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표준이 가장 안 보이는 때는 이름을 감출 때가 아닙니다. 양쪽 다 된다고 할 때입니다.
나무를 대패로 밀어 보면 방향이 하나 있습니다. 한쪽으로 밀면 매끄럽게 나가고 반대로 밀면 표면이 뜯깁니다. 나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대패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방향이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사람에게도 그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결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결과 버릇은 다릅니다
여기서 곧바로 미끄러지는 자리가 있습니다.
결이라는 말이 손에 들어오면 그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이 말로 닫으면 결은 그 순간 핑계가 됩니다.
그러니 하나를 갈라 두어야 합니다. 결과 버릇은 다릅니다.
버릇은 여러 해 애쓰면 바뀝니다. 결은 여러 해 애써도 늘 같은 데로 되돌아옵니다. 가르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정직해야 합니다. 애써 보았습니까. 애써 본 적이 없는 것을 결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결을 안다고 해서 애쓸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왼손잡이 아이도 가위질은 배워야 합니다. 결을 안다는 것은 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맞는 가위를 쥐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서툴게 시작하고 여러 번 망칩니다. 다만 망칠 때마다 자기 손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에 맞춰 주지 않습니다. 왼손잡이 가위가 놓여 있는 교실은 드뭅니다. 회사도 학교도 대개 다수 쪽으로 만들어져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결을 알았다고 해서 앉은 자리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바뀌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자기를 탓하던 것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아 보입니까. 오래 자기 흠이라고 믿어 온 사람에게는 작지 않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저는 삼십 년 동안 사람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자주 들은 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탓하는 말이었습니다.
마흔 초반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같은 회사에서 십 년 넘게 일하셨는데, 회의만 하고 나면 마음이 무거우셨다고 합니다.
까닭은 이랬습니다. 회의 자리에서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데, 회의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할 말이 다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또렷하기까지 하다고 하셨습니다.
십 년 동안 그러셨습니다. 돌아오는 길마다 스스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내 머리는 왜 이렇게 안 돌아갈까.
그런데 그 부서에서 가장 좋은 보고서를 쓰신 분이 그분이었습니다.
머리가 느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말보다 글로 먼저 서는 결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있고 드물지도 않습니다.
다만 회의라는 것이 말로 하는 자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회의라고 불립니다.
이름이 붙지 않은 쪽이 표준입니다.
십 년 동안 그분이 의심한 것은 회의라는 형식이 아니라 자기 머리였습니다.
당신이 오래 자기 흠이라고 여겨 온 것을 하나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은 정말 당신의 흠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오른손잡이 가위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까.
자기 결은 자기 눈에 가장 안 보입니다
이 물음이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왼손잡이 아이가 자기 손을 의심한 까닭은 다른 가위를 본 적이 없어서입니다. 견줄 것이 없으면 어긋남은 언제나 자기 탓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기 결은 자기 눈에 가장 안 보입니다.
녹음된 제 목소리를 처음 들어 본 사람은 대개 그것이 자기 목소리 같지 않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내가 말할 때 그 소리는 두 길로 옵니다. 하나는 입에서 나와 공기를 지나 귀로 들어오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뼈를 타고 안에서 곧바로 속귀에 닿는 길입니다. 뼈는 낮은 소리를 잘 나릅니다. 그래서 그 길로 온 쪽이 더 낮고 두툼합니다.
녹음에는 그 두 번째 길이 없습니다. 남들이 평생 들어 온 것이 바로 그 소리입니다.
그러니 낯선 쪽이 진짜입니다.
평생 그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들어 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남입니다.
결도 그렇습니다. 평생 그것으로 살았어도 밖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결은 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몸에도 배움에도 일에도 돈에도 저마다 다른 결이 있습니다. 한 자리에서는 매끄럽게 나가던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는 늘 뜯깁니다. 그래서 하나로 묶어 놓고 보지 않고 여덟으로 나누어 봅니다.
그러니 혼자서는 여기까지입니다.
자기 결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곳은 혼자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른 결을 가진 사람 옆에 섰을 때입니다. 거기서 그 사람이 나를 뜯고, 내가 그 사람을 뜯습니다.
다음은 둘이 있는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