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의 둘째 단서, 목적

목적은 설계의 세 단서 가운데 둘째로, 무엇을 위해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냥 있게 된 것이라면 무엇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목적은 물건을 아무리 분해해도 나오지 않고, 쓰는 사람이 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고장이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목적 하나를 손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설계도를 읽는 둘째 단서가 그 손을 펴 보게 합니다.

언제 고장이라고 말하는가

시계가 하루에 오 분씩 빨라진다고 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것을 고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같은 시계가 무겁다고 고장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줄이 손목에 헐거워도 고장은 아닙니다. 불편할 뿐입니다.

같은 물건인데 어떤 어긋남만 고장이 되고 나머지는 그냥 특징이 됩니다.

무엇이 그 둘을 갈랐습니까.

시간을 정확히 알리는 일입니다. 그 일에 걸리는 어긋남만 고장이 되고, 나머지는 아무리 거슬려도 특징으로 남습니다.

그러니 「고장」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우리는 이미 목적 하나를 손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면 고장인지 아닌지 판정할 수 없습니다.

바닷가의 그 돌을 다시 보십시오. 둘로 깨져도 아무도 그것을 고장이라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둘째 단서입니다. 무엇을 위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재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언제 고장이라 부르는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목적은 물건 안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연필심의 방식은 이백삼십 년쯤 전에 정해졌습니다.

그 이백삼십 년 동안 연필로 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머리를 틀어 올려 꽂기도 하고, 창틀에 끼워 창을 받쳐 두기도 하고, 두드려 박자를 맞추기도 합니다. 급하면 페인트통 뚜껑을 밀어 올리는 데도 씁니다.

그래도 연필이 머리핀이 되지는 않습니다.

쓰임은 여럿이고 바뀝니다. 쓰는 사람 수만큼 늘어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연필의 목적이 되지는 못합니다. 머리에 꽂기 좋으라고 그 굵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쓰는 사람 쪽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건 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첫째 단서에서 시계를 완전히 분해해 보았지만, 왜 시간을 재려 했는지는 톱니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목적은 그 물건이 있기 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직해야 합니다.

목적처럼 보이는데 아닌 것이 있습니다. 사막에 사는 여우는 귀가 아주 큽니다. 개의 무리 가운데 몸에 견준 귀의 비율이 가장 큽니다.

그 귀는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열을 내보내고, 모래 밑에서 움직이는 것을 듣습니다. 둘 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데 꼭 맞습니다.

그러면 그 귀는 무엇을 위해 커진 것입니까. 더위를 견디기 위해서입니까, 먹이를 찾기 위해서입니까.

기능을 세어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능이 둘이면 목적도 둘입니까. 잘 들어맞는 일이 하나 더 늘었을 뿐입니다.

생물학은 이 자리를 다르게 읽습니다. 열을 내보내려고, 또는 잘 들으려고 커진 것이 아니라, 귀가 큰 개체가 그 땅에서 더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되었는가」와 「그렇게 된 것이 남았는가」는 다른 문장입니다.

기능은 목적처럼 보이지만 목적의 증거는 아닙니다.

여기서 읽기가 갈립니다. 정직하게 다뤄야 할 자리라, 둘째 세계에서 다시 펼치겠습니다.

지금 손에 쥘 것은 하나입니다. 잘 들어맞는다는 것만으로는 목적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무엇에 견주어 잘못됐다고 하십니까

사물에서는 고장을 쉽게 판정합니다. 사람에서는 그 판정이 훨씬 자주, 훨씬 함부로 내려집니다.

저는 삼십 년 동안 사람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여러 번 들은 문장이 있습니다.

제 인생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되물은 것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무엇에 견주어 그렇습니까.

이 물음에 바로 답하신 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나오는 대답은 대개 남의 것이었습니다. 그 나이에는 이만큼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 남들은 다 그렇게 산다는 말, 부모가 오래전에 정해 둔 도착점 하나. 자기 것이 아니라 빌려 온 목적표로 스스로를 재고 있었습니다.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십 년 넘게 해 온 일을 접고 나서, 자기 인생 전부가 실패로 보인다고. 그런데 무엇에 견주어 실패냐고 여쭈니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 일을 시작할 때 무엇을 바랐는지도 이미 잊고 계셨습니다.

고장을 판정하려면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목적을 모르는 채로 내리는 것은 판정이 아니라 짐작입니다. 남의 목적표로 내리는 것은 짐작보다 나쁩니다. 틀린 자에 대고 자기를 깎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여덟 결이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읽어야 할 무늬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몸, 배움, 일, 사랑, 부부, 자녀, 돈, 나이 듦. 이 여덟 자리에서 우리가 자주 하는 일은 읽는 것이 아니라 판정하는 것입니다. 읽기 전에 판정하면 언제나 남의 자를 쓰게 됩니다.

그러니 한 번 멈춰 보십시오.

당신이 자기 인생의 어느 대목을 잘못됐다고 부를 때,

그 판정은 무엇에 견주어 내린 것입니까.

목적이 알려 주지 않는 것

목적을 물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대답이 한 걸음씩 밀려납니다.

연필은 무엇을 위해 있습니까. 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쓰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남기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여기서부터 대답이 느려집니다.

첫째 단서는 물건 안에서 끝났습니다. 부분들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는 그 물건을 다 분해하면 나옵니다. 그런데 둘째 단서는 언제나 물건 밖을 가리킵니다. 목적을 따라가면 그 물건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것이 목적의 성질입니다.

그 되물음이 어디서 멈추는지, 그 끝에 무엇이 서 있는지. 이 글은 거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목적이 자기 밖을 가리킨다는 것까지가 둘째 단서의 몫입니다.

다만 이 글이 치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됐다고 부르려면 먼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 자기 인생에 그 물음을 한 번 대 보신 분은, 남의 자를 손에서 놓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곤란한 자리가 하나 남습니다.

목적을 끝까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재지 못하고 끝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는 채로도 물을 수 있는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흩어져 있어야 할 모양입니까.

셋째 단서가 그 물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