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세계, 사람이 만든 것
첫째 세계 사람이 만든 것은 설계의 세 단서를 처음 대어 보는 자리입니다. 연필 한 자루에서 천 년 된 건물까지, 여기서는 누구도 우연을 말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설계도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곳에서 자를 먼저 맞춰 보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만든 것 가운데도 아무도 그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 예외가 이 세계를 정직하게 만듭니다.
새 자는 아는 값에 먼저 대어 봅니다
유리관에 눈금을 새겨 온도계를 하나 만들었다고 해 보십시오.
이 눈금이 맞는지 어떻게 압니까.
모르는 것을 재어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재고 나서 그 값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합니다. 답을 이미 아는 자리에 먼저 넣습니다.
얼음이 녹는 물에 넣습니다. 영이 나와야 합니다. 끓는 물에 넣습니다. 백이 나와야 합니다.
두 곳에서 맞으면 그 사이의 모르는 값도 믿습니다. 어긋나면 눈금을 고칩니다. 계기를 새로 만든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설계의 세 단서로 자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부분들이 맞물려 있는가, 무엇을 위해 있는가, 무작위와 무엇이 다른가. 이제 그 자가 제대로 듣는지 확인할 차례입니다.
답을 이미 아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사람이 만든 것들이 놓인 자리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다투지 않습니다.
만든 사람을 몰라도 만들어진 것은 압니다
연필 한 자루를 앞에 두고 이것이 우연히 생겼겠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마트폰도, 천 년을 버틴 석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확신합니까.
만든 사람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 년 된 석탑을 누가 설계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름도 없고 기록도 없습니다. 그래도 설계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무엇이 그것을 알게 합니까. 세 단서입니다.
부분들이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분명합니다. 흩어져 있어야 할 돌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셋이 다 서면 우리는 만든 이를 몰라도 만들어졌다고 판정합니다.
그리고 이 판정을 우리는 날마다 하고 있습니다. 낯선 물건을 처음 보아도 이것이 물건인지 부스러기인지 한눈에 압니다. 배운 적이 없는데 합니다.
자가 제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다 설계된 것은 아닙니다.
산에 난 오솔길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든 것이 맞습니다. 다니지 않았으면 없었을 길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길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밟히고 또 밟혀서 생긴 것입니다. 세 단서를 대어 보면 금방 갈립니다. 부분이 맞물려 있지 않고, 어디로 나야 하는지도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 문법을 누가 정했습니까. 아무도 앉아서 그것을 설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규칙이 있고, 어기면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스무 살 무렵에 저는 제도판 앞에 서 있었습니다. 기계공학과 이학년, 도면을 그리는 수업이었습니다.
화면에 그리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티자를 대고 삼각자를 얹어 손으로 그었습니다. 굵기가 다른 샤프펜슬 두 자루를 바꿔 가며 선을 나누고, 곡선은 운형자를 돌려 맞췄습니다. 트레이싱지 위에서 한 줄을 잘못 그으면 지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장을 걷어 내고 처음부터 다시 그렸습니다. 도면 한 장에 며칠이 갔습니다.
첫 과제는 작은 부품 하나였습니다. 손에 쥐면 한 줌인 쇠붙이를 앞에서 본 그림, 위에서 본 그림, 옆에서 본 그림 셋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그 셋을 다 그리고 나서 알았습니다.
이 부품은 도면 위에서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그러니 「사람이 만들었다」와 「설계되었다」는 다른 말입니다. 첫째 세계는 둘이 함께 있고, 그래서 자를 맞춰 보기에 좋은 곳입니다. 한쪽만 있으면 무엇을 갈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말
사물에서는 자가 잘 듣습니다. 사람의 인생에서는 어떻습니까.
저는 삼십 년 동안 사람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처음부터 설명해 달라고 하면 거의 모든 분이 같은 말로 시작하십니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학교에 가려던 것이 아닌데 가게 되었고, 그 일을 하려던 것이 아닌데 하게 되었고, 그 사람과 살 줄은 몰랐는데 살고 있다고 하십니다.
자기 인생을 오솔길로 보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린 것이 아니라 밟히다 보니 생긴 길. 발이 가는 대로 갔더니 여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오솔길이 실제로 있으니까요.
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께 여쭈어 보면, 정작 자기 인생에 자를 대어 보신 적은 없었습니다. 오솔길이라고 판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부르고 계셨습니다.
마흔 중반의 한 여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쩌다 보니 스무 해 넘게 한 일이 원래 하려던 것이 아니어서, 늘 자기 인생을 남의 옷 같다고 여기며 살았다고. 그 일은 공무원이었고, 홍보와 게시판을 맡으셨습니다. 그전에 잠깐 배우다 접으신 것이 디자인이었고, 지금 자리 잡고 하시는 것도 디자인입니다. 스무 해 내내 그 줄 위에 계셨습니다. 본인만 그 줄을 못 보고 계셨습니다.
밟혀서 생긴 길인지 그려진 길인지는 불러 보아서 정해지지 않습니다. 대어 보아야 정해집니다.
그러니 한 번 대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은 그려진 것입니까,
밟혀서 생긴 것입니까.
여기서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첫째 세계에서 자가 제대로 들었습니다. 세 단서를 대면 그려진 것과 밟혀 생긴 것이 갈립니다. 연필과 오솔길이 한자리에 있어도 섞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한계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서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온도계가 끓는 물에서 백을 가리켰다고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계기를 맞추는 자리는 계기를 자랑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음에 모르는 것을 잴 자격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첫째 세계에서 나온 결론으로 무엇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연필이 설계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다른 데까지 밀고 가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얻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자가 실제로 무언가를 갈랐다는 것.
이제 답을 모르는 자리로 갑니다.
아무도 그리지 않은 것들이 놓인 곳입니다. 잎맥과 눈송이와 별이 있고, 만든 이가 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같은 자를 그대로 대어 보겠습니다.
자를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리가 바뀌었다고 눈금을 고치면, 그것은 재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답을 만드는 것입니다.